농아인의 날, 농인을 위한 이름으로 농인이 배제되고 있지 않은가 / 농인 등대지기
수어와 농인의 권리를 말하는 제도와 사업, 정작 농인은 결정의 중심에 서 있는가
6월 3일은 농아인의 날이다.
이날이 되면 우리는 농인의 권리, 수어, 소통, 접근성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러나 이제는 조금 더 불편한 질문을 던져야 한다. 우리 사회는 정말 농인을 중심에 두고 있는가. 농인을 위한 제도와 사업이라는 이름 아래, 농인은 주변으로 밀려나고 있지는 않은가.
농인을 이해하는 출발점은 ‘듣지 못함’이 아니라 ‘언어’여야 한다. 농인은 단순히 청각에 장애가 있는 사람이 아니라, 한국수어를 통해 생각하고 관계를 맺으며 세상을 이해하는 사람이다. 한국수어는 한국어를 손으로 옮긴 보조 수단이 아니다. 농인의 삶과 문화, 역사와 감각이 담긴 독립된 언어다.
그런데 우리 사회의 많은 제도는 여전히 음성언어 중심으로 움직인다. 회의, 교육, 병원, 법원, 직장, 공공기관에서 중요한 정보는 대부분 말과 글을 중심으로 전달된다. 수어통역이 제공되더라도 그것이 농인의 실질적인 이해와 참여를 보장하는지는 별개의 문제다.
접근권은 통역사를 배치했다는 사실만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농인이 내용을 이해하고, 자신의 의견을 말하고, 결정 과정에 동등하게 참여할 수 있어야 비로소 접근권이 보장되었다고 할 수 있다.
문제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농인을 대표하고 지원해야 할 기관과 사업 구조 안에서도 농인이 주변화되는 일이 반복되고 있다. 최근 한국농아인협회를 둘러싼 감사 결과와 각종 논란은 많은 농인과 수어통역사, 현장 종사자들에게 큰 실망을 안겼다. 보건복지부는 특정감사 결과 일부 고위 간부의 범죄 혐의를 확인해 수사기관에 사건을 의뢰했으며, 회계 투명성과 수어통역센터 운영에 관한 제도 개선의 필요성도 제기되었다.
이 사안을 단순히 한 단체의 문제로만 보아서는 안 된다. 농인의 권익을 말하는 조직이 농인의 신뢰를 잃고, 현장 종사자들이 문제 제기를 주저하게 되며, 공익제보가 있어야만 문제가 드러나는 구조라면 그것은 농사회* 전체가 함께 고민해야 할 과제다. 농인을 위한 조직은 농인 위에 군림하는 곳이 되어서는 안 된다. 농인의 언어권과 삶을 지키기 위해 존재하는 기관이라면 그 운영 역시 농인과 현장 노동자 앞에 투명해야 한다.
수어 관련 공공사업도 마찬가지다. 한국수어 말뭉치, 수어 사전, 수어 영상 도서, 수어 통번역 기술 개발은 모두 농인의 언어권과 직결된 공공 영역이다. 그러나 일부 사업에서는 청인 중심의 회사나 기관이 사업을 주도하고, 농인 전문가는 기획과 의사결정의 중심에 서기보다 자문, 검수, 영상 출연 등 제한적 역할에 머무는 경우가 적지 않다. 농인의 언어를 다루는 사업에서 농인이 주변적 역할에 머무는 것은 매우 모순적이다.
물론 청인 연구자, 개발자, 기획자, 행정가의 역할이 필요 없다는 뜻은 아니다. 문제는 참여 자체가 아니라 주도권이다. 수어를 모르는 사람이 사업의 방향과 예산을 결정하고, 농인은 나중에 불려 와 “맞는지 확인해 달라”는 방식으로 참여한다면 그것은 농인 중심 사업이라고 보기 어렵다. 농인은 자료 제공자나 검수자가 아니라 한국수어의 실제 사용자이자 해석자이며, 사업의 방향을 함께 결정해야 할 주체다.
한국수어 사전과 수어 자료 구축도 같은 맥락에서 중요하다. 사전은 단순히 단어를 모아 놓은 자료가 아니다. 한 언어가 사회적으로 어떻게 인정되고 기록되는지를 보여 주는 기반이다. 수어의 의미, 용례, 변이형, 농인의 실제 사용 방식이 제대로 기록될 때 한국수어는 더 풍부하게 보존되고 다음 세대에 전달될 수 있다. 농인의 언어 감각과 문화적 맥락이 충분히 반영되지 않는다면, 살아 있는 언어는 행정 자료나 영상 파일로만 남게 될 수 있다.
농인에게 필요한 것은 시혜적 배려가 아니다. 자신의 언어로 말하고, 이해하고, 판단하고, 결정 과정에 참여할 권리다. 농인의 이름으로 예산이 쓰이고 기관이 운영되며 사업이 만들어진다면, 그 모든 과정은 농인 앞에 설명 가능해야 한다. 그 인정은 선언이 아니라 구조로 증명되어야 한다.
한국수어가 존중받는 사회는 농인이 중심에 서는 사회다. 농아인의 날은 바로 그 질문을 우리 사회에 던지는 날이어야 한다.
*농사회: 한국수어를 중심으로 형성된 농인의 문화와 공동체, 사회를 아우르는 말
필자 소개
농인 등대지기. 농인의 언어와 권리가 존중받는 사회를 꿈꾸며 수어 관련 연구와 기록 활동에 참여하고 있다. 농사회의 현재를 성찰하고 미래의 방향을 함께 고민하는 글을 쓰고 있다.
